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문단 편집) ===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 이처럼 [[인문학]]과 [[페미니즘]]의 분야에서 호평 받고 있는 본서이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불만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본서의 사상적 바탕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에 입각함에 따라 반[[유물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심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성지현(2017)의 서평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성지현 (2017).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마르크스21, 20, 28-47.] 우선적으로 성지현(2017)은 본서가 전제하는 포스트식민주의의 방법론을 문제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본서는 "권력자가 언어를 만들고, 이로써 다시 현실을 만든다" 고 전제하며, 모든 현실은 결국 권력을 통해 구성된 재현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접근은 '''남성의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순진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구조의 분석에 있어서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이런 관점은, 또한 언어가 기본적으로 집단적 상호작용을 위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위해 나타났다는 점을 무시하며, 언어가 언제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결정적" 이고 "완전한" 영향을 끼친다고 과장한다. 권력구조와 여성에 대해서 [[유물론]]에 입각하여 볼 경우, 사뭇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성차별]]에 대해서 정희진(2017)은 [[젠더]]가 문화적 구성물인 만큼 남녀의 생물학적 속성을 거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이는 모두 계급사회적인 가족제도를 배경으로 한다. 사회의 근본적 분할선이 바로 계급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정희진(2017)과 [[미셸 푸코]]가 주장하는 [[권력]] 역시 '''실체가 모호한 개념화'''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에 따르면, '''권력은 계급과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되는 순간 대체 그 권력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설명할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남녀의 생물학적 속성 역시 논외로 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실재하지 않을 경우 남성 권력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단에서 인용한 바 있듯이) 정희진(2017)은 남성들에게도 육아의 고통을 체감시켜야 이중노동의 문제가 해결되고 진정한 노동의 평등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성지현(2017)은 이것이 '''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남성 개인에 대한 비난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주장은 오히려 국가가 보육지원을 소극적이게 만드는 데에도 악용될 수 있는 논리라고 우려한다. 남성들의 가사노동 참여를 핑계로 [[예산]]지원을 줄일 경우 이를 막을 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보육지원의 만성적인 부족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더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 원래 보육지원은 상당한 정부지출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지현(2017)은 또한 양성평등이 과연 "여성운동의 덫" 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양성평등은 몇 가지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의제이며,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정말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평등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의제화했기 때문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의 양성평등 운동이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시키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나타냈다고 봐야 한다. 양성평등은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 계급에게 이로울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어떤 평등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가 중요하다. 예컨대, 저자에 따르면, 양성평등의 확대를 위해 [[부르주아|부유한 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권리를 쟁취해 내는 방식을 따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라면 성지현(2017)은 그 양성평등은 분명 바람직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성지현(2017)은 젠더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한다. 젠더 주류화를 통해 국가 기관과 각종 법 제도들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보장하는 길이 열렸지만, 이는 결국 '''그 자체로 여성차별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이 변화하는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스트들은 그 원인을 양성평등 담론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유리천장|자본주의 체제의 고위직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그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성지현(2017)은 '''여성운동에 있어 진정 필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라고 천명한다.''' 그에 따르면 정희진(2017) 등이 취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사회적 투쟁에 있어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담론 자체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 가능할지에 대해 의심하며, 결과적으로 이들의 논리는 기껏해야 담론에 균열을 내는 "해체" 로서의 저항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고작해야 "언어적 투쟁" 에 불과한 것으로, 언어를 통해 권력관계를 어찌해 보겠다는 이들의 발상은 '''당장 냉혹한 경제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방식인 것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주체" 라고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노동자 계급 역시 한낱 담론을 실천하는 처지에 있을 뿐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적 변화를 이끌기 힘들다는 것.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사회운동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서 "언어가 권력을 반영한다" 는 정희진(2017)의 시각과 "노동자 계급의 당장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는 성지현(2017)의 시각은 정면 충돌한다. 이 서평의 제목이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인 것은 바로 이 점을 반영하는 것. 즉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본서의 접근 방식은 담론에 담론이 뒤섞이는 말잔치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을 바꿀 힘도 없고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비관하는 (것으로 보이는) 본서의 논의들은 불만스럽게 느껴질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